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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군ORIGIN
가평읍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가평이라는 소지명은 이미 신라시대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 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원도 춘천시와 인접해 있고 춘천시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군청소재지 이자 가평군의 행정 중심지로서 향교(鄕校)와 경찰서,교육청,농협등의 기관이 모두 가평읍에 소재한다.
읍내에서 북으로는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 동편에 명산 보납산(寶納山)이 수천년의 역사를 지켜보며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 강가에 서있다.
서기 1896년(고종 33년) 8월 정부의 관재개혁으로 邑中 부락과 內西面을 통폐합하여 郡內面이라 이름 붙였으며
관할동리는 읍내리 , 대곡리 , 달전리 , 하색리 , 상색리 , 두밀리 , 경반리 , 마장리 , 승안리 , 개곡리등 10개리 였다.
그 후 1932년 군내면이 가평면으로 개편되고 , 1973년 7월 가평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가평읍은 14개의 법정리와 31개의 행정리가 있고 , 3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총면적 145.㎢ 위에 주민 18,773명이 거주하고 있다.
상면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상면(上面)은 가평군 서쪽에 위치한 면으로서 하면(下面)과 더불어 고구려 시대에는 심천(深川 깊은내,깊으내)
또는 복사매(伏斯買)라 불렀고, 신라시대에는 준천(浚川)현이었고, 고려조 현종(顯宗 9)년대에 이르러 조종현(朝宗縣)이라
개명하였으며 상면은 조종상면(朝宗上面)이라 하였다. 이 당시에는 가평군과 더불어 강원도 춘주부(春州府 춘천)에 예속되었고
1396년 태조가 등극한 후 가평군은 현이 되어 감무(監務)가 부임하면서부터 조종현을 가평현에 통합되었다.
1413년(太宗 13) 가평현에는 현감이 부임하고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이때는 양주진(揚汎{鎭)의 감리를 받았다.
1698년(肅宗 24) 태봉리에서 세거(世居)하는 연안 이씨로써 영의정이 된 이천보(李天輔)가 출생하다.
그후로도 관할구역은 그대로인 채 가평군과 더불어 강원도 경기도를 오고가며 예속되다가 1896년 가평군이 독립되고
6개면의 하나가 되었다.
1871년 당시에 제작된 가평군읍지에 이르면 조종상면에는 자연행정부락이 율길리((栗吉里), 봉수리(熢燧里), 원흥촌(元興村),
상동(霜洞),태봉동(胎封洞), 연하리(蓮下里),반계동(盤溪洞),항사리(項7少里), 와가동(瓦家洞),천곡(泉谷),평촌 (坪村),행현(杏峴 ),
축령리(祝靈里 ), 임초리(林草里 ),덕현리(德峴里 ), 조가터(曺哥垈), 간성대(竿城垈) 등 17개동에
전체호수(戶數)가438호였다고 기록됨을 볼 수 있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연하리 역말(驛村)부락에는 연동역(蓮洞驛)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조정(朝廷)으 로 왕래하는 관리들의 교통 편리를 위해 말(馬)1필과 마부가 상주했다고 한다.
또한 덕현리 다원동(茶院洞)에는 이곳을 지나는 관리들 이날이 저물면 묵어 가거나 쉬어갈수 있는 다원(茶院)이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편히 머물다 갔다고 한다.
하면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하면 ( 下面 ) 은 원래 독립된 현으로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에는 삼천현또는 복사매라 불렀으며 ,
신라시대에 준천이라 고쳐지면서부터 가평군에 감무를 받아왔다.
조종이라는 이름은 고려 현종왕 당시에 붙여졌으며 이때부터 조종현 이라 불러온다.
명산으로는 운악산이 있는데 경치가 너무도 수려한 나머지 가평금강이라 하지 아니하고 ,
경기금강이라 부르며 이 산 능선아래 천년의 고찰인 현등사가 있다.
경내에는 지방유명문 화재 63 호로 등록된 삼층석탑을 위시하여 함허대사부도탑 , 지진탑 , 북악부도등이 있고 ,
1619 년에 주조된 동종은 귀중한 문화재로 여긴다. 또한 관세음보살 후불탱화등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이다.
현등사로 오르는 계곡에는 아기 자기한 폭포와 기암 괴석들이 즐비하고 무우폭포 , 백년폭포 , 궁소등은 천하일품이다.
한말 궁내부 시종무관장이던 민영환 이 이곳 무우폭포에 이르러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에 이름 세자를 새겨 놓은 것이 더욱 이채롭다.
그밖에 하판리 현등사 입구에는 민영환 , 조병세 , 최익현 을 추모하여 제사지내던 삼충단터가 있고 ,
현리 안곡부락에는 연안이씨비각이 있는데 비각에는 이소한 , 이유상 , 이은상 의 신도비 가 있으며
하면 대보리 조종암 ( 지방기념물 28 호 ) 과 현리 현창사 등은 이지방의 귀중한 민속 문화재로 꼽힌다.
또한 이조 숙종 24 년 (1697 년 ) 에 쌓은 제방이 현리 조종천에 있었다고 하나 그후 다시 축조 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가평이씨의 시조묘가 하판리에 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자료가 없고 다만 민영환 이 살던 집터 ( 영양부락 ) 에는 주추돌 몇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1871 년 당시의 조종 하면의 방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현리 , 영양촌 , 석사촌 , 내곡 , 내세곡 , 외세곡 , 신상리 ,
신중리 , 중판미리 , 정수동 , 행랑촌 , 구이목 , 하판미리 , 마일 , 신하리 , 망동 , 하대리 , 다복촌 , 상대리등 19 동이 있었고 전체 호수가 624 호였 음을 알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현재 고등학교 1, 중학교 1, 초등학교 1 개교가 있으며 , 7 개의 법정리와 17 개의 행정리 ,
20 개의 자연부락에 총 9,083 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청평면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청평면(淸平面)은 가평읍에서 서쪽 편에 위치한 면이라 하여 외서면이라 하였으나,
이곳은 청평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2004년 12월 1일부로 행정명칭이 청평면으로 변경된 가평군의 교통 중심지이고,
자연경관이 극치를 이루는 고장이다. 예로부터 서울을 왕래하는 문무백관들이나, 저자 상인들이 드나들던 지역이라,
사람이 들끓던 고장이다. 그러므로 이 외서면 지역은 그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주 이용되고, 때로는 여가를 선용하는 선망의 대상지었다.
전여울에서 쏟아지는 북한강의 물보라가 다시 조종천에서 유입되는 황공탄에 부딪히는 장관을 보노라면 누구인들 경탄치 않았으라만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청평천의 웅장함이 더욱 절승이었다 니 그 아름다움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1871년 당시 청평면은 비금리(秘琴里), 내방동(內坊洞), 외방동(外坊 洞 ), 상입석(上立石 ), 하입 석 (下 立石 ), 신촌(新村 ),
오리둥(于1里洞), 대승리(大升里), 험천동(險川洞), 청간천(淸干川), 갈오개(葛五介),잠곡리(潛谷里),오촌(午村),하감천(下甘泉),
수리현(秀理峴), 상감천(上甘泉), 초옥동(草王洞)동 17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39년 1차 행정개편과 1942년 재 개편에 의하여 청평 상천 하천·대성·입석·외방 내방·호명·고성 리로 동리 멍을 개명하였으며,
1973년 관제개편에 의하여 입 석·외방·내방리를 양주군 수동면으로 이관시키고,
청평면은 양평군 서종면 삼회리, 학야리를 흡수하여 관할하게 되었다.
1609년 이곳 청평으로 잠곡 김육(潛谷 金堉)이 낙향하여 직접 밭을 갈고 심으며 숯을 구어 팔아 호 구지책을 삼으면서도,
학문에 뜻을 두어 192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가 동부승지, 한성부좌윤, 영중추부사등을 거치면서 대동법을 시행토록 하고,
시헌력을 제작하였으며,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키 는 등 그의 경제정책은 실학의 선구자 역이 되었고,
후생 교육에도 힘을 써 수많은 서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잠곡동에서 두아들을 얻었는데 우명(佑明)은 청평부원군이 되었다.
그가 학동을 가르치던 터에 서원을 세우고 잠곡서원(潛谷書院)이라 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폐쇄되고 지금은 서원지(書院址)만이 그 옛날의 이야기만을 들려주고 있다.
1893년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가 낙향하여 애국총정의 정신을 심어 주었는데
그가 남긴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는 너무도 유명하다.
현재 청평면은 법정리수가 7개리이고 총면적이 114.49㎞이며 전국 단일면으로서는
그 길이가 가장 길어 경춘선의 기차역 가운데 대성·청평·상천역 3개가 있다.
설악면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백제시대에는 거사참(去斯緻), 항양(恒陽),양근(楊根)군에 속해 있던 미원장(迷源莊)이었다.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빈양(濱陽)군에 속해 있었고,94O년인 고려 태조 23년에는 양근군에 예속되었으며,
그후 광주부(廣州府)에 편입되었다가 1175년 양근현에 감무가 부임하여 편입되고,
고려고종 44년인 1257년 영학 (永化)현의 감무를 받고, 1267년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이라는 덕으로
익화현(益化縣)으로 승격되어 현감이 부임하니 미원장은 익화현 북면이었다.
1356년(공민왕 5) 국사승(國師僧), 보우(普愚)의 세거지(世居地, 出生地)라 하여 익화현은 양근군(楊根郡)으로 승격되고,
미원장은 미원현(迷源縣)으로 격상되었으나, 미원현은 인구가 희소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현이면서도 양근군 감무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1658넌(孝宗 9)에는 양근군과 더불어 지평군(砥平郡)에 예속되었다가 1668년(顯宗 9) 양근군에 감무를 받고,
1728년(英祖 4) 양근군이 현으로 강등되고 미원현은 상북·하북면으로 갈려 예속되었다.
1741년 양근군으로 다시 승격되고 미원현은 상도면 하도면으로 개칭하다.
1747년(英祖 23) 군을 갈산(葛山 일명 乾芝山)으로 옮기고, 군수가 부임하여 미원은 상도·하도 그대로 두다.
그후로도 1785년(正祖 9)에 강등되었던 현이 다시 군으로 승격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미원현은 상도·하도로 있었고,
계속하여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때의 관할은 여주진(驪州鎭)이었다.
1895년 관재개혁에 의하여 양근군 설악면으로 개명되고,1942년 행정개편에 의하여 설악면은 가평군 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973년 양평군 서종면 이천리가 다시 설악면으로 편입되었다. 설악면은 가평군 남단에 위치한 군으로서 동으로 장락산맥을 넘으면
홍천군 모곡이 나오고, 남으로 용문산 넘어 양평군과 인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홍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 설악면의 명산인 울업산을 스치며 자잠나루를 거쳐 청평댐으로 쏟아지는
호반의 풍경이 그림같이 은은하다 문향이란 이름 그대로 미원서원(迷源書院)을 철폐 당한 후에도 지방유림들이
그 학문의 정신을 이어 가고자 설치한 경현단(景賢壇) 에서는 해마다 명현들에게 예(禮)를 올리며,
방일리 음방에 있는 별묘(別廟·弄九齋)에는 지금도 낙은암계곡을 배회하며 노래하던 남도진(南道振)의 영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설곡리 소설(기,雪)부락운 楊根致北四十里지역으로 전국 十勝之地의 하나인데,
이곳은 고려조 국사 승이던 보조국사 보우(普愚)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위곡리에서 출생한 이규봉(李圭鳳)은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당시 가평군의 지도자였고,
그의 아들 이윤석(李胤錫)은 애국지사로서 한서 남궁억과 더불어 무궁화지도의 주동 인물이었으며,
그의 손자 이원영(李元永)은 현재 일본에서 서예의 대가로 군림하고 있다.
신천리 망두산에는 태종대왕의 5대손인 이강백(李剛伯)의 묘가 있고 세골입구에는 가은군(加,恩君) 이분(李汾)의 묘와
신도비가 흘러간 역사의 귀안길을 알려주는 듯 하다.
장돌(丈石村)부락 미원천변 바위에는 丈石洞天이란 암각서가 찾는 이들의 이정표인양 징겨웁고,
묵안리 장수바위에는 墨岩洞天三淸日月이란 글자들이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 준다.
여기 저기 세워 놓은 수많은 신도비·송덕비·추모비들이 이 고장의 고귀한 정신을 대변해 주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곳곳마다 문인들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현재의 설악면은 총면적 141.42평방미터에 법정리수가 15개이다.
신천(新)I1)·선촌(仙村)·사룡(少龍)·송산(松山)· 미사(彌沙)·위곡(位谷)·창의(倉宜)·엄소(嚴7召)· 설곡(雪谷)·
묵안(墨安)·가일(可逸)·방일(訪逸)· 천안(天安)·이천(梨泉)·회곡(檜谷)리로서 총38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북면 유래(가평의 지명과 유래에서 발췌)
북면(北面)온 가평군 최북단에 위치하며 화악산·웅봉·촉대봉· 가덕산·석릉산·명지산·국망봉·강씨봉·수덕산 등
경기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들이 즐비한 심산협곡의 산악지대이다.
1895년 상북 하북면으로 개편되고 1939년에 다시 북면으로 환원되었다.
이 당시 적목리는 포천군에 속해 있었는데 가평군 북면으로 편입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된 가평읍지에 의하면 1871년 현재 북면에는 이곡(梨谷), 화악(華岳), 소법(所法),
제구렁(濟救寧), 도대리(道大里), 백둔리(栢屯里), 상목동(上休洞), 죽둔리(竹屯里)등 8개의 행정부락이 있었으며
전체호수가451호 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적목리 논남부락은 지금도 포천이라는 말이 전해지는데 이곳에서 포천으로 가는 고개를 도성재(者陜刺見)라 하고
왼쪽으로 해발 830m정도의 산이 보이는데 이산을 강씨봉(姜氏峰)이라 부른다.
이 논남부 락 강씨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선조 숙종시절 이 마을에는 강영천(姜永天)이라는 어린 효자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간질병 환자였다고 한다.
어느 날 강영천이 서당으로 공부를 하러 갔다가 간질병에는 사람의 피가 약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병이 더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인사불성이므로 어린 강영천은 생각다 못해 자신의 손가락을 뒤창문에 끼고 터트려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드리고 정신을 잃게 되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되찾은 후 곁에서 피를 홀리며 쓰러져 있는 영천이를 보고 그제야 자신에게 피를 넣어 준 것을 알게 되었고,
그후로는 간질병이 나았다는 갸륵한 효자의 이야기다.
이 사실을 접해 들은 숙종대왕은 1700년(肅宗 27)에 효자 강영천에게 효자정문을 내리고 그의 효성 을 칭찬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효자문에 그때 하사 받은 정문판이 보존되어 있다.
효자문은 1806년에 세웠으나 1989년에 다시 복원하여 문화재로 등록하였다.